[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보부상 박승직, 두산그룹의 터를 닦다

입력 2017-01-13 17:02   수정 2017-01-13 17:03

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1)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종로4가 로터리의 창경궁 쪽 모퉁이에 두산그룹 발상지라는 이름의 소공원이 있다. 1896년 박승직이라는 상인이 이 자리에서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이 상점이 나중에 두산그룹이 된다. 이 소공원은 1996년, 두산그룹이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조성했다. 120년 역사의 두산그룹은 현존하는 한국 기업 중 최장수 기업으로 공인됐다.


■ 기억해 주세요^^

박승직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이자 해방 직전 상점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6·25 전쟁이 나던 1950년, 86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끝난 것은 아니다. 1946년 그의 아들 박두병에게 가게 문을 다시 열게 하고 두산(斗山)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갑오개혁과 박승직 상점

박승직은 보부상으로 상인 생활을 시작했다. 1882년, 그가 18세 되던 해 전국을 다니며 시골 아낙들이 짠 옷감을 수집해 한양에 팔기 시작했다. 지금의 종로5가 광장시장 부근인 배오개에 집을 마련해 놓고 수집해온 것들을 거래했는데, 정식 가게를 열지는 못했다. 육의전 상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포목점을 열려면 육의전 상인이어야 했다. 박승직 같은 보부상은 정식으로 가게를 내고 장사를 하면 안 됐다. 광목, 비단, 명주, 모시 같은 옷감뿐 아니라 종이, 어물 등이 모두 규제 대상이었다. 육의전이 아닌 상인들은 ‘난전’이라고 불렸으며 언제든 폭력적 단속을 당해야 하는 처지였다. 수백년간 그랬다. 그 때문에 조선의 상업은 피폐했고 백성들의 삶은 궁핍했지만 수백년 동안 육의점 독점 체제는 변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1894년 갑오개혁으로 변화가 왔다. 육의전 독점권이 폐지된 것이다. 떠돌이 상인들, 즉 난전들도 비로소 합법적으로 떳떳하게 자기 가게를 낼 수 있게 됐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6년 박승직도 자기 이름을 내걸고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그 상점이 해방 후 두산그룹으로 발전했다.

옷감 화장품 쌀 거래…‘배오개의 거상’

박승직이 배오개의 거상으로 불리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박승직 상점에 물건을 공급했고 더욱 많은 소비자들이 그곳에 와서 옷감을 샀다. 초기에는 조선 시장만을 상대로 했지만 1910년대 후반부터는 장춘 하얼빈 등 만주 지방으로까지 진출했다. 1915년부터는 화장품 사업에도 진출했다. 그의 부인 정정숙이 사은품으로 만들어 나눠준 분(파운데이션 같은 화장품)이 손님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자 정식 제품으로 만들어 판매를 시작했다. 또 1917년부터는 동대문 일대에서 쌀 장사에도 진출한다. 광장시장의 사장이 돼 조선상인들의 장사 터전을 닦기도 했다. 이래저래 박승직은 배오개의 거상이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다.

상인으로서 박승직의 영향력이 컸음은 1919년 고종께서 승하했을 때, 그리고 1926년 순종께서 승하했을 때도 박승직이 상민봉도단장을 맡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봉도단이란 임금의 상여를 매기 위해 조직한 모임이다. 왕가봉도단, 상민(常民)봉도단 등으로 구성됐는데 박승직은 그런 국가적 행사에 두 번이나 상민 대표로 선발됐다. 대표적인 거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약속과 신용의 상인이 되다

그가 상인으로서 신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약속을 철저히 지켰고 또 용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새로운 스타일의 상인이었다. 전통적으로 조선에서는 상인들을 천하게 여겼다. 사농공상이라는 국법 질서상 가장 천한 직업이기도 했지만 상인 자신들도 대부분 천하게 행동한 것이 사실이다. 고객들의 눈을 속이고 약속을 어기는 것이 다반사였다. 또 장사의 규모를 키우려 하기보다는 번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사고 벼슬길에 나서려 했다. 박승직이 새로운 종류의 상인인 것은 약속과 신용을 목숨처럼 중히 여겼고 벼슬길에 나서는 대신 사업 확장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기업가의 출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박승직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이자 해방 직전 상점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6·25 전쟁이 나던 1950년, 86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끝난 것은 아니다. 1946년 그의 아들 박두병에게 가게 문을 다시 열게 하고 두산(斗山)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말(斗)들이 쌓여 산을 이루라는 뜻이 담겼는데 그의 뜻대로 됐다. 박승직 상점에서 OB맥주로 변신을 했고, 1990년 대 말에는 두산중공업이라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박승직의 정신은 두산그룹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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